Anthropometry-Walking woman




Anthropometry-Walking woman. 156x54x124cm. polyurethane, wood. 2017



Anthropometry



Anthropometry. 144x70x51cm. polyurethane, wood. 2017 
 

Anthropometry

Anthropometry. 164 x 57x 61cm.polyurethane ,wood,plaster. 2017
 

 

 


Bust

Bust. 37x18x49cm. polyurethane,plaster,epoxy. 2017


Anthropometry -전시서문






재현과 비재현        -   정현(미술비평, 인하대학교)
 
보이지 않는 것의 재현 
                                                                                                                                                                                              
양태란 발생하는 모든 것, 즉 파동과 진동, 이주, 문턱과 구배, 특정한 모태로부터 시작해 특정한 유형의 실체 아래에서 생산된 강렬함이다.” 1)
 
그림이 인간을 겉모습을 재현하려는 행위라면, 조각은 인간을 만드는 행위에 가깝다. 흙으로 빚은 인간의 형상, 무한한 염원을 담아 만든 투박한 민초의 불상은 인간이 조각을 대하는 태도가 단순히 정확한 재현이 아니란 걸 알려준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장소를 차지하고 우뚝 서 있는 조각상을 그저 바라보는 대상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조각상은 시대를 막론하고 숭배와 혐오, 서로 대립되는 두 감정을 산출한다. 수많은 기념동상은 이념과 체제의 변화에 따라 그 운명이 달라진다. 흥분한 군중은 실제 인물을 대신해 그/그녀를 닮은 조각상에 분풀이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르네상스 시대에도 조각이 우상이 되는 걸 염려했다는 사실은 인체 조각이란 실존과 재현이 서로 분리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떠올리게 한다.
 
조각이 인간의 형상을 다시 적극적으로 재현하기 시작한 건 20여 년 전부터였다. 그동안 구상 조각이 덜 보였던 이유는 모더니즘 미학 체제에 따라 물질 자체의 물성과 장소를 점유하는 다양한 방식 그리고 대지와 자연에 개입하여 생성과 소멸의 시간성을 강조하여 재현 조각의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모더니즘 정신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재등장한 인체 중심의 구상 조각은 인간 형상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다시 마주한다. 새로운 인체 조각은 신체와 장소의 관계를 실험하고, 상품자본주의를 극단으로 전유하고, 인체를 그대로 복제하여 재현이란 미학적 체제를 모호하게 만들고, 극사실적 재현을 통하여 포스트 휴먼의 불안을 야기하는 등, 인류가 겪고 있는 폭력, 혐오, 불안, 단절로 치닫는 동시대의 개인을 재현한다. 이 조각들은 우상과는 거리가 먼 불안정하고 괴기스럽게 변하는 불확실한 불-안한 신체(dis-easy body)이다.
 
이병호는 조각의 재현성자체를 문제적으로 본다. 그는 실제 공간을 점유하고 부피와 무게를 지닌 조각을 두고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어보길 원한다. 초기작부터 꾸준히 천착한 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작업 태도는 전에 비하여 훨씬 더 조각의 본질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전시 표제 앤트로포메트리(Anthropometry)”는 인체측정이란 의미를 가지며, 이브 클라인의 작업 제목이기도 하다. 이 작업은 여성 모델들이 직접 자신의 몸 위에 물감을 칠한 뒤 벽에 세워진 화면 위에 자기 신체의 얼룩을 남겨 재현의 방식, 그림의 규범에서 한순간에 다른 차원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재현을 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형상을 제시한 작업으로 유명하다. 이전 개인전 <() Le Vide>(2016)에서도 이브 클라인의 흔적은 쉽게 발견된다. 프랑스 현대미술관에서는 몇 해 전에 <Le Vide>라는 기획전을 연 적이 있었다. 미술관 내부에 작품을 하나도 놓치 않은 상태로 전시를 진행하여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관객들은 텅 빈 공간을 배회하다가 지쳐 미술관을 나오는 전시로도 악명도 높았다. 이병호는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존재를 조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도 인체 조각을 통해서 말이다. 초기에는 실리콘 조각 내부에 공기 주입장치를 사용해 공기흡입 시 얼굴이 수축되는 다소 극단적인 방식으로 인간, 존재, 생명이 무엇인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이후 박제의 원리를 차용한 대안적이고 가변적인 조각 방식을 통해 인간의 외형과 신체의 내부를 분리한다. 박제가 신체의 외부만을 남기고 내부는 제거한 뒤 형상을 재현하는 방식이라면, 이병호는 바로 그 내부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이지 않는 것을 재현할 수 있는가가 이 작업의 핵심이다.
 
몸의 재현이란 단순한 아름다움과 유사성에 관한 개념이 아니다. 몸의 재현이란 사회 체제가 만들어내는 가치의 재생산이다. 그런데 재현하되 닮음을 비교할 수 없으며, 하나의 원형에서 파생되었지만 서로 동일하지 않는 상태의 몸으로 계속 변태한다는 건 미학적 의미를 지닌 몸의 재현이란 개념과 배치된 이병호의 작업은 초기부터 지금까지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 위에서 펼쳐진다. 작가는 이 경계 위에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조각에 관한 낡았지만 여전히 강력한 관습에 대한 미시적인 저항으로, 조각이 신체를 재현한 인공적 가공물(artefact)을 넘어서 시간과 함께 변화하는 존재의 가능성을 시도한다. 조각의 경계에 관한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분석은 이병호가 추구하는 신체가 아닌 신체 너머의 존재성이란 물음에 어느 정도 유의미한 단서를 제공한다. “로댕의 조각에 있어서는, 우리가 내적이고 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외적이고 공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사이의 경계선인 신체의 표면이 바로 의미가 발생하는 장소이다.”2) 크라우스는 신체의 표면은 내부의 힘, 즉 인간의 근육의 움직임에 의하여 나타난다고 명시한다. 즉 조각의 겉과 속이 연결된 상태로 결국 여기서 말하는 표면(경계)이란 곧 세잔이 지각한 현상학적 세계관과 유사하다. “로댕은 계속적으로 관람자가 작품을 과정의 결과로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상을 이루는 행위의 결과로서 인식하게 만든다3)는 점을 주목한다. 로댕이 자신의 조각의 표면, 형상의 경계 위에 의식의 흐름을 기입했다면 이병호는 시간의 흐름을 분해하고 이를 재조합하여 시간의 질서를 혼합해버린다.
 
우선 전시 포스터부터 살펴보자. 포스터에는 모두 두 개의 형태가 혼합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측정도, 프란시스 베이컨의 육면체. 여기에 이브 클라인의 사상이 덧붙여진다. 다빈치의 인체가 완벽한 비례를 가진 이상적 인간상이라면, 베이컨의 신체는 이와 배치된다. 그것은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며 유동적이고 비이성적이다. 광기와 불안으로 이 신체는 인간의 몸에서 탈주하여 기관 없는 신체가 된다. 들뢰즈가 제시한 기관 없는 신체란 형상 없는 형상을 의미한다. 그가 말하는 노마디즘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장소로 이동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같은 곳에서 끊임없이 다른 것, 이질적인 것의 파편들과 재조합하여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자신의 형상을 해체하여 그 조각들을 반복적으로 재조합하는 것처럼 말이다. 베이컨의 육면체는 고립된 공간이 아닌 변형과 재조합이 일어나는 고원과 마찬가지다. 이병호는 실제 신체를 원형으로 한 주물을 뜬 후 이를 다수 복제한다. 복제물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형을 겪는다. 가슴 일부가 절개되고 엉덩이 부분이 일부 제거된다. 이 파편들은 다른 복제물의 신체 사이로 접합되고 이식된다. 일련의 과정은 움직임에 대한 반응이다. 미래주의 조각이 동세를 넘어 시간의 경과를 재현한 것과 비교해보면 그와는 반대의 방식으로 시간성이 기입된다. 이병호의 조각들이 앞으로 무엇으로 변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인체의 재현과 형상이 갖는 상징성으로부터의 탈주, 그리고 보이는 것이 아닌 존재하는 것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예술가가 예술가로 계속 살아가는 방식일 것이다.
 

1)들뢰즈 & 가타리,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3, 295

2)로잘린드 크라우스, 현대조각의 흐름예경, 1998, 42

3)같은 책, 44(굵은 체는 필자 강조)

The depth of chalice - Gallery Sueno339

Triptych 2016 ~ 2017


These sculptures continuously transforming on each exhibition.


Two Figures 2016 ~ 2017


Bust

Bust .30x22x49cm .polyurethane .2016

  
  

Anthropometry - Torso

Anthropometry - 
Torso .51x22x89cm. polyurethane ,wood,plaster,wire .2016





Le Vide - Gallery Kiche

Two Figures .244x61x151cm .polyurethane,wood,plaster,aluminium .2016
 
 

 
 

Triptych

'Le Vide', Gallery Kiche 
 
 

'Body Matters' , SOMA

 
 

 

 



Le Vide, 空의 영역 < 전시서문 >

 
 
 

불가능한 존재,
텅 빔의 나타남
 
[이병호: Le Vide, 의 영역]                    안 소 연  미술비평
 
공백, 그것이 환기시키는 불안은 아무 것도 없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야 할 것이 아직 드러나지 않음으로 인한 존재에 대한 강렬한 기다림 때문일 것이다. 이미 여기 있어 왔던 공백의 실체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자는, 예컨대 (형태의 내부로서의) 그 공백이 생산해낼 수 있는 우회적인 다수의 형상들을 내심 기대하는 것이다. 이병호의 개인전 [Le Vide, 의 영역](2016)은 그렇게 붙잡을 수 없는 공백의 실체를 인정하고, 그 존재에 다가가기 위한 예술적 사유의 한 흔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지금까지 고전적인 조각의 형태를 참조해, 그 충만한 외피가 노골적으로 감추고 있는 공허한 형상들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 벌거벗은 형태의 공허함
 
사실 이번 전시에서 우리가 보게 될 형상들은 너무 낯설다. 평소 이병호의 정교한 작업 방식을 지켜봐왔던 이들에게, 외피로부터 발가벗겨진 이 거친 형상들은 무엇이라 명명하기 힘들 정도다. 이 형상들은 외피의 안정적인 형태,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난 임의의 공백을 실체화한다. 돌이켜보면, 2007년 무렵부터 시작해 온 실리콘 조각에서도 형태에 대해 그가 가져왔던 동일한 사유와 그 흔적들을 대략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병호는 구체적인 대상을 지시하는 일련의 형태로서의 조각을 제작해왔다. 특히 인체에 대한 매우 사실적인 묘사는, 보는 이의 시점을 곧장 외피의 윤곽선에 고정시켜 놓을 만큼 안정적이고 충분하다. 등지고 누워 있는 여성의 신체를 좌대 위에 묘사해 놓은 <Deep Breathing>(2011), 고전적 미의 규범을 모방하듯 완벽한 윤곽선을 과시한다. 하지만 좌대와 일체인 양 꽉 차 있던 단일의 윤곽선은 어떤 동력에 의해 당장 그 존재를 위협받게 되는데, 견고한 외피를 지탱해주던 공기가 내부로부터 서서히 빠져나가자 사라진 형태들이 남겨놓은 존재의 흔적은 또 다른 형태의 윤곽을 새롭게 규정한다. 그것이 이병호가 말하는 내부영역이자 껍질 이면에 존재하는 텅 빈 영역의 실체를 지각하는 방법이다. 1)
 
그는 줄곧 조각의 강한 물성이 빚어내는 물리적 형태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여 왔으나, 정작 그의 관심은 강력한 윤곽선 밑에 봉인되어 있는 비물질적인 차원의 존재를 어떻게든 사유하는 데 있었다. 이처럼 최근까지 그의 작업은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그것의 현전을 모색해 온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짐작컨대 이러한 비가시적인 사유의 과정을 환기시키기 위해 오히려 익숙한 조각적 상태의 본질에 더욱 다가가려 했을 것이다. 조각적 형태의 표면을 충분히 재현해 놓음으로써 보는 이의 시선을 무력하게 안주시키는가 싶다가도, 느닷없이 그 형태의 윤곽을 불확실한 공백의 차원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무력했던 시선마저 그 벌거벗은 변화의 순간을 목격하는 적극적인 사유의 과정 속으로 끌어들인다.
 
한데, 이병호는 이번 전시 [Le Vide, 의 영역]에서 그토록 비물질적 차원의 존재-다수를 실체화하기 위해 부여잡고 있었던 단일-형태의 선명한 윤곽을 지워보려 했다. 형태가 만들어 놓은 경계, 즉 윤곽으로부터 벗어난 미완의 자유로운 인체 형상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애써 모방해 왔던 몸의 표면/경계/윤곽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그 안의 불확실한 공백임을 자처한다. 이때 공의 영역이라는 그 불가능한 실체, 즉 텅 빔의 나타남을 다시 조각적 형태로 사유해 보기 위해 이병호는 박제 제작 과정을 참조했다. 동물의 몸통에서 벗겨낸 얇은 외피로 본래의 형태를 다시 모방하기 위해서는, 그 외피와 그것의 움직임을 지탱해 줄 내부 공간이라는 임의의 실체를 얻어야만 한다. 결국 이병호는 윤곽을 가진 형태의 외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간, 이를테면 벌거벗은 형태의 텅 빈 실체와 외적 윤곽으로부터 구속되지 않는 운동성을 어떻게든 상상해야만 하는 것이다.
 
| 새로운 임무를 향한 다수의 형상들
 
전시된 동명의 두 작업 <Two Figures>(2016)를 보면, 마치 미완인 듯 불확실해 보이는 두 개의 거친 인체 형상이 뭔가 확신할 수 없는 운동성을 암시하고 있다. 형태가 발현되는 것인지 사라지는 것인지 조차 알 수 없는 이 모호한 실체는, 결과적으로 하나의 단일-형태로부터 비롯된 다수성(multiplicity)의 논리를 증명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이병호는 두 점의 <Two Figures> 뿐 아니라,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 <Triptych>(2016)<Bust>(2016)에 이르는 총 여덟 개의 인체 형상을 단일한 원형 틀에서 복제해 각각 변형시키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복제된 단일형태의 윤곽선을 과감히 해체하고 지워나가면서, 그 형태의 고정된 외피 안에 보이지 않게 잠복해 있던 무한한 다수의 형상을 출현시킬 방법을 어떻게든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때문에 그는 무한한 다수의 형상이 차지하고 있는 형태의 텅 빈 내부 공간에 주목했다. 이는 철학자 바디우가 말한 대로 나타나지 않고 감각할 수 없는 다수들의 상징을 일컫는 공백(le vide)”이라는 차원에서 그의 철학적 사유와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병호의 작업은 견고한 조각적 형태 안에 존재하면서도 좀처럼 명명할 수 없었던 공()의 영역에 다가가, 나타나지 않고 감각할 수 없는 다수의 존재를 상상하는 것이다. 형태의 틀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그 형태 내부에 존재하는 공백에 대한 역설적인 실체를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일이다. 마치 바디우가 중력으로부터 벗어난 의 아름다움을 사유하면서, 춤 속에 있는 고정되지 않은 것의 은유를 설명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병호는 조각적 형태 안에 고정되지 않은 것의 은유로서 공의 영역이 존재함을 강조해왔으며,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불확실한 공백의 차원을 은유하는 일련의 형상들을 탐색함으로써 그 공백을 드러내는 (불가능한) 조각적 시도를 감행했다. 하지만 바디우가 자신의 논의에서 공백은 하나의 이름일 뿐이며 공백이 그 자체로 드러나거나 무화되기를 바라는것은 불가능한 욕망이라 말했듯이, 공백에 대한 이병호의 조각적 사유는 애초에 실패를 자초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 이 다수의 형상들은 드러나기를 거부하는, 순수한 명명으로만 남게 될 공백에 적극 다가간다. 그렇기 때문에 공백과 최대한 가까워진 형상들이라 말하는 것이 좀 더 적절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torso, bust, figure 등으로 이름 붙여질 수밖에 없는 이 거친 형상들은 공백 그 자체라기보다는 공백을 사유하는 하나의 은유이자, 텅 빔을 명명하는 논리의 과정 안에 존재한다. 이병호는 이를 조각이라는 특수한 사건속에서 발생시키려 한 것이며, 이같이 조각적 형태를 초월하려는 사유는 줄곧 현대조각의 핵심을 관통해 왔다. 나타나지도 감각할 수도 없는 비가시적 영역에 대한 조각적 시도는, 단일하고 투명한 시각적 총체를 추구해온 미학적 규범 대신 형태의 불투명한 내부에 서성이고 있는 유령 같은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공백 그 자체만을 보여주었던 이브 클라인(Yves Klein)의 전시 Le Vide(1958)에서 제목을 가져온 이병호의 [Le Vide, 의 영역], 형태의 윤곽을 망각하여 어디에도 매여 있지 않은 형상을 가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벌거벗은 익명의 다수 형상들이 단일-형태의 내부, 즉 스스로의 공백에 위치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의 조각은 형태와 존재에 관한 이런 역설적 사유 안에 놓여있다. 2)
                                                                                                                                                                      
 

1) 이병호의 실리콘 조각 연작은 내부에 부착된 센서를 통해 형태의 움직임과 변화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그 제작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조각의 외피는 흙으로 빚은 인체의 원형을 파손시키지 않도록 틀을 떠낸 뒤 실리콘으로 얇게 캐스팅하여 완성된다. 이때 남겨진 원형으로 작가는 그 표면을 조각해 들어가면서 동시에 해부학적 골격을 제작한다. 외피와 달리 내부 골격은 실리콘보다 단단한 재질의 FRP로 캐스팅 한 후, 유연한 외피를 지탱해주는 실제적인 골격의 기능을 담당한다. 최종적으로 골격과 외피 사이에 공기를 주입해 완벽한 형태를 갖추게 되지만, 센서를 통해 서서히 공기가 빠져나가면 형태의 윤곽은 차츰 변형되어 마침내 해부학적 골격 위에 포개어진다.

 

2) 이 글의 전반적인 내용은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비미학을 참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