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ted Figure


Seated Figure 240 x 150 x 190 cm silicone. air compressor.iron. black water 2019





REPETITION AND DIFFERENCE : ABOUT TIME - Busan Museum of Art

Anthropometry 2019






반복과 차이 : 시간에 관하여 - 부산 시립미술관




시간 지우기 - 카이로스의 시간을 재맥락화하는 조각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시간을 되돌리거나 지울 수 있을까? 시간은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공기나 햇빛처럼 대우주로부터 거저 받은 선물이다. 누구나 공평하게 자연으로부터 물려받은 크로노스(kronos)’라는 객관적인 시간은 인간이 되돌리거나 지울 수 없는 불가항력의 무엇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존재는 시간 앞에 무력하다.
다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지금이라는 현재에서 카이로스(kairos)’라는 주관적 시간에 천착하는 일뿐이다. 그것은 나에게만 허락된 시간으로 나의 선택에 의해 특별한 존재 의미가 부여되는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시간이다. 죽음이 아니라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 보이던 시간의 재구성은 카이로스의 시간에서 가능해진다. 과거를 망각 속에 묻어 두거나, 기억 속 과거를 소환하여 현재의 시간 안에 걷게 하는 일이 말이다. 또한 시간을 경영하여 자신만의 카이로스적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믿음마저 가능하게 한다. 예술은 크로노스의 시간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엄연한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상상력의 이름으로 시간의 맥락을 해체하고 재조합함으로써, 이러한 카이로스의 시간을 유유히 횡단한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이병호의 작품 세계는 이러한 시간성의 화두 속에 놓여 있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탈맥락화(decontextualize)’한 결과물인 카이로스의 시간을 재맥락화(recontextualize)’하면서 자신의 작업을 이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카이로스의 미시적 시간 안에서 크로노스의 거시적 시간의 의미를 성찰한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3개의 방 안에 각각 3개의 소주제에 해당하는 전시를 펼친다. 한 방에는 초기작에 속하는 실리콘 조각의 외형을 변형시키는 일련의 Vanitas Bust와 연동되는 작품들을, 또 한 방에는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인체 측정(Antropometry)연작을, 마지막 방에는 신작인 Seated Figure을 선보인다. ‘1’로부터 3’까지 번호를 매겨, 각 작품들에서 시간의 탈맥락화/재맥락화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드러나는지를 살펴보자.
 
1_ 삶과 죽음 사이의 바니타스
먼저 첫째 방에는 오래전부터 선보여 왔던 흉상 연작과 누워 있는 여인상이 전시된다. 이것은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조각체의 외피가 공기의 흡입과 배출을 거듭하는 모터의 작용에 의해 점차 쭈그러지고 다시 회복하기를 거듭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위해서 작가는 흙으로 빚은 흉상의 외피를 실리콘으로 얇게 떠내고, 해부학적 골격이나 노화된 주름과 같은 단단한 FRP 재질의 내피를 만든다. 여기에 주입되는 공기를 조절하여 외피와 내피를 압착시키거나 이격시키기를 거듭하는 모터 장치와 센서를 부가해서 실감나는 키네틱 조각을 만든다.
Vanitas Bust시리즈에서 소녀상은 천천히 노파가 되었다가 되돌아오고, 소년은 서서히 해골의 모습으로 변모했다가 되돌아오기를 거듭한다. 옆으로 누워 있는 젊은 여인상을 형상화한 작품 Deep Breathing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해골이 앙상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파괴의 본능을 동반하는 타나토스(Thanatos)’라 불리는 죽음의 본능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은 자학과 가학을 통해 약동하는 생명으로부터 파괴와 파멸을 이끌어 내어 없음의 존재로 환원하고자 한다. 타나노스는 끊임없이 자기 보존과 성적 본능인 에로스(Eros)’와 대립하고 투쟁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치열한 쟁투가 가시적으로 펼쳐지는 인체 조각을 통해서 인간의 삶을 짧은 시간 안에 응축해서 보여 주는 그의 작품은 충격적인 조형 언어로 누구에게나 주어진 크로노스라는 시간의 본질을 일깨우면서 인간 존재론의 문제를 성찰하게 만든다. 우리의 삶에는 이러한 보존과 파괴의 대립 속에서 상실, 소멸의 허무한 그림자가 언제나 드리워져 있지 않던가? 이병호가 작품명으로 인생의 덧없음을 의미하는 라틴어 바니타스를 제시한 까닭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작품은 보이지 않는 공기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실리콘 피부와 FRP 해골 또는 근육 사이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가시화한다. 공기를 흡착하는 죽음의 과정은 공기를 주입하면서 비대해지는 성기나, 가슴, 근육들을 통해 죽음 의 과정 옆에서 작동한다. 등신대의 작은 인체 조각이 삶과 죽음에 관한 버거운 문제의식을 한 덩어리로 끌어안는 셈이다. 한 주체의 희로애락이 또 다른 주체인 타자의 생로병사의 역사 속에서 함께 작동하는 것이 인간 존재론인 것처럼 말이다.
 
2_ 해체와 재구성을 잇는 안토로포메트리
둘째 방에는 최근에 골몰하고 있는 작품 Antropometry연작이 선보인다. 이 방에는 열 개의 인체 형상이 천장으로부터 매달려 있다. 이브 클라인(Yves Klein)1960년 작품명에서 가져온 이 작품은 기존의 재현이 아닌 방식으로 형상을 드러내는 클라인의 미학을 공유한다. 즉 모델링(modelling)이나 카빙(carving)이 아닌 모듈이 되는 복수의 인체 조각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서 조각에서의 새로운 의미의 형상 구축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작품을 위해서 이병호는 먼저 편히 서기(easy stance)’와 같은 전형적인 자세를 한 실제 인체의 캐스팅을 거친 후, 이것을 단일한 원형 틀로 삼아 폴리우레탄 재질의 인체 조각을 무수히 복제 생산한다. 이어서 인체 조각들을 부분별로 절단하여 그 파편들을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포즈의 조각을 만들어 낸다.
새로운 포즈의 조각이란, 미켈란젤로, 카미유 클로델, 로댕 등 미술사 속 거장 조각가들의 군상 작품에 나타난 인물의 포즈를 참조하여, 변형, 재생산한 것이다.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의 작품 피에타에서 예수를 성모 마리아로부터 떼어 내고, 예수상의 포즈를 변형, 변주하여 공중에 매다는 조각적 설치의 방식을 구사함으로써, 비슷해 보이면서도 전혀 다른 조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병호의 작품은 거장으로부터 비롯된 카이로스의 시간을 해체(탈맥락화)하는 동시에 재구성(재맥락화)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해체와 재구성의 과정이 그의 완성된 조각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은 파편들을 이어 붙인 그의 인체 조형이 선보이는 조형력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조각이 지닌 표현주의의 거친 분위기와 질감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작가가 의도하는 바이다. 그는 무한 복제된 인체 조각을 절단하여 얻은 파편들을 이어 붙이면서 만들어진 접합면 사이의 빈 공간을 마치 칼날에 베인 흔적처럼 고의로 남겨두거나 그 사이에 폴리우레탄을 주입하여 고름 혹은 상흔처럼 부풀어 오르게 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변주한다. 폴리우레탄 조각체 위에 석고를 얇게 입혀 조각의 전체 피부를 만드는 마지막 과정에서도 어떤 작품에는 석고를 의도적으로 불균일하게 도포함으로써 우레탄 표면이 드문드문 드러나게 하는 조형 방식도 이러한 작품 변주에 일조한다. 이러한 결과 그의 조각은 거칠고도 매끈한 마티에르가 공존함으로써 마치 표현주의 계열의 작품처럼 보이게 된다.
주도면밀한 관객이라면, 그의 작품이 표현주의의 조형 기술 안에 해체와 재구성, 즉 탈맥락화와 재맥락이라는 미학적 장치를 숨겨두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는 미켈란젤로와 같은 거장의 작품을 참조하여 자신의 작품 안으로 가져오되, 변형, 변주를 통해 전통적 재현의 맥락을 지우고, 개념적 추상을 지향함으로써 무의미를 지향한다. ‘형상 안에서의 무의미라니? 그것은 그가 참조하는 조각의 시대적, 상황적 맥락을 지우고 새로운 양상으로 현재화하는 일뿐만이 아니라, 그가 재료로 사용하는 실물 캐스팅 인체 조각의 파편을 그저 건조한 조립체의 모듈처럼 탈맥락화하고 있기 때문에 기인한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그의 작품에서 구상과 추상 그리고 미니멀 양상의 어떤 지점을 오가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렇다. 그는 가능한 모든 맥락을 지움으로써 무의미를 낳는 깊은 시간의 바다에 잠입하고자 한다. 즉 타자의 카이로스의 시간을 탈맥락화하고, 재맥락화하여 자신만의 시간 미학을 깊이 탐구해 들어가는 것이다.
 
3_ 보이지 않는 것의 현시와 카이로스의 시간
마지막 방에 선보이고 있는 신작인 Seated Figure는 어떠한가? 이 작품은 의미심장하다. 어두움으로 가득 찬 커다란 방 안에서 홀로 빛을 받고 있는 인체 조각상 한 점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마치 기념비처럼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은색 물로 가득 찬 수조로 만들어진 좌대 위에 누운 듯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는 하얀 인체상은 느린 동작으로 숨을 쉰다. 부드러운 실리콘 피부가 모터에 의해 해부학적 근육의 FRP 내피와 맞물리기까지 공기를 서서히 흡착하고 다시 공기를 주입하면서 서로의 간극을 이완시키기를 거듭하는 인체상은 마치 온몸으로 들숨과 날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얀 피부가 깡마른 근육에 맞닿고 떨어지기를 거듭하는 동안 모터의 진동이 수조 안에 파동을 일으키고 수면 위에 잔잔한 파장을 만들어 낸다.
보라! 죽음과 삶이 납작하게 맞붙은 이 곳에서 작은 생명은 죽음마저 껴안는다. 시간이 정지된 듯한 어둠의 공간을 살려 내는 빛, 고요한 정적을 깨우는 인체 조각의 느린 움직임과 잔잔한 모터 소리, 그리고 먹물로 가득 채운 수조의 잔잔한 파장이 풍기는 짙은 묵향! 이 모든 것들은 그의 인체 조각을 삶에 번민하는 인간으로 육화(肉化)시킨다.
그런데 작가 이병호는 왜 이 넓은 전시장에, 비교적 작은 규모의 작품 한 점만을 출품하고 있는 것일까? 작은 작품 한 점으로도 넓은 공간을 점유할 수 있다는 공간 연출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인가? 관객이 갖게 되는 이러한 의문점은 작가가 이미 간파한 것이다. 따라서 3’에서의 이러한 형식의 전시는 다분히 의도된 것이다. 생각해 보자. 어떠한 작가에게나 화이트 큐브의 전시장은 해체와 재구성을 통한 탈맥락화와 재맥락화를 실험하는 공간이다. 작가마다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붙잡아 둔 카이로스의 시간을 전시라는 이름으로 펼쳐 보이는 공간인 것이다. 그것을 극대화하는 것을 과제로 삼은 작가와 그렇지 않은 작가가 있을 따름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병호는 다수의 작가처럼 후자에 속한다. 그가 조각에 충실한 채, 간헐적으로 조각적 설치를 실천해 왔던 것처럼, 화이트 큐브의 전시장 전체를 재맥락화하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 자체에 골몰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적어도 앞서 두 개의 방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작품 외부의 공간보다 작품 자체에 집중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흥미로운 것은 앞서의 경우와 달리, 작가 이병호가 이 3’에서의 전시를 위해 작품이자 공간 연출이기 되기도 하는 일련의 프레임의 형식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체 조각을 싸고 있는 직육면체 프레임과 좌대를 포함해 전체를 덮고 있는 또 다른 프레임을 선보일 계획이다. 이것은 직각의 프레임이기보다 원근의 시점을 고려한 변형각을 지닌 육면체이다. 이병호에게 이 육면체의 텅빈 프레임은 보이지 않는 공간을 분절하는 레이어인 동시에 전시 공간 전체를 작품으로 끌어들여 작품의 규모를 전시 공간 전체로 확장하게 만드는 일련의 장치인 셈이다.
밝음 속 인체 조각’, ‘어둠 속 전시 공간의 사이에 위치한 육면체 프레임은 공기와도 같은 보이지 않는 매개체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의 작품에서 공기가 실리콘 피부를 움직이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크로노스라는 생로병사의 객관적 시간을 성찰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3’의 전시에서 육면체 프레임은 빛과 어둠을 가시적으로 명확히 분절할 수 없는 우리의 삶 속 ‘3차원 공간이라는 것이 결국 시간이 함께 맞물려 있는 ‘4차원 시공간임을 성찰하게 만든다. 따라서 그의 육면체 프레임은 실제로는 가시적 공간을 분절하지 못하지는 무력한 존재이지만, 외려 보이지 않는 공간을 분절하고 확장하는 상징적인 매개체로 자리를 잡는다. 예술이 만드는 역설이다. 그가 보이지 않는 것의 현시를 어떻게 할 수 있을지를 늘 고민해 온 결과라 하겠다.
 
에필로그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온다. “시간을 되돌리거나 지울 수 있을까?” 우리는 그것이 현재적 삶 속에서 작동시키는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서 과거를 현재화하는 기억과 미래를 앞당기는 상상과 같은 일들로 가능한 것으로 파악했다. 더욱이 예술 창작은 이러한 카이로스의 시간을 이끄는 힘이다. 작가 이병호는 타자의 카이로스로서의 시간을 지운다. 과거의 역사적 맥락을 지우고 재구성한 인체 조각 속에서 형상의 맥락을 지우고, 모든 맥락으로부터 탈주하는 무의미를 만든 상태에서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드러내고자 한다. 아직은 그것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오늘도 그것을 여전히 찾고 있는 중이다.





[리뷰] - STATUE X STATUE - 2018.11.7~11.25 상업화랑


<추상적 대상으로써의 인체 조각>  - 신승오(페리지갤러리디렉터)    

이병호는 고전주의적 인체조각을 소재로 삼아 조각에서 표현하기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유동하는 상태의 조각을 제시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해오고 있다그의 이전 작업들은 실리콘을 이용하여 조각의 외부의 표면과 내부의 사이의 공간에 주목해 사이에 공기를 주입하고 빼내는 반복적인 장치를 통해 형태의 변화와 움직임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것들이었다최근의 작업들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발견하게 된다우선 그는 재료에서부터 작품의 유연한 표면을 위해 선택한 실리콘에서 다양한 표현을 있는 폴리우레탄으로 교체하였다이러한 재료의 변화는 그의 작업에서 인체를 대상으로 하여 여러 가지의 작업 방식 표현 방법을 실험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이는 전시장에서 다양한 포즈의 인체들을공중에 매달거나 벽에 부착하기도 하고혹은 철제 구조에 고정시켜 보여주는 설치 방식에서도 찾아볼 있다그의 신작들은 인체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는가 하면팔과 다리 심지어 머리를 제거하여 토르소와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그러나 우리가 더욱 주목해 보아야 것은 인체의 표면에 대한 표현이다신체는 여기저기 잘려져서 분절되어 있어 갈라진 사이로 내부를 드러내며,때론 매끈하기도구멍이 나있기도부풀어 올라있기도 하면서 표면에 어떤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이번 <STATUE X STATUE>에서는더 나아가 이전에 전시되었던 작품을 다시 해체하고 분해하여 다른 작품의 부분으로 재조합 하거나 자연광을 충분히 전시장에 끌어들여 조각을 보는 위치에 따라 지각하는 것이 달라지게 하는 방식까지 사용하고 있다그렇다면 그는 이러한 작업은 어떻게 읽어 있을까?
일단 그의 작업 방식부터 살펴보면우선 라이브 캐스팅을 통해 인체의 기본적인 틀을 만든다그리고 틀에 캐스팅을 반복적으로 하여 작업을 위한 재료로써 신체들을 쌓아 놓는다기본적인 모듈처럼 단일한 형태를 가진 신체의 덩어리들을 규격화하는 것이다이런 재료들은 작가의 직관에 따라 다시 하나의 인체로써 재조합 혹은 신체의 변형을 통해 하나의 인체 작업으로 나타난다.이러한 결과물들은 표면적으로는 조각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체의 아름다움을 탐미하는 작업으로 보인다그러나 이병호에게 있어서 인체 조각은 사람의 몸을 표현하기 위한 대상이 아니다그는 조각이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성질인 덩어리무게실존변함 없음고정된완전함 같은 단어에서 벗어나 가볍고변화 가능성이 충만하고 나아가 특정한 의미에 고정되지 않은 조각언어를 획득함으로써 그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조각에서의 유동성 획득하고자 한다따라서 그가 선택한 방법들은 전통적인 조각이 가지고 있는 고정된 완성이라는 것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그렇다면 이를 통해 작가는 어떤 이야기 하는 것일까?

이런 관점으로 보면 그의 작업은 우리가 현재 순간에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의식하여야 대상이다물론 표면적으로 보이는 인체조각이라는 범주화된 대상으로 이름으로 붙여지고 고정된 결과물로 수도 있지만우리는 이러한 시도를 멈추어야 한다.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업을 단순하게 기존의 조각적 특성에 반해서 불가능한 과제를 실행하기 위한 과정으로만 인식해서 된다.오히려 이는 실재의 것을 직관적으로 읽어내기 위해서 완성 혹은 완결될 없는 대상을 만들어 내어 인식을 전환하려는 행위를 집중해서 보아야 한다다시 말해 결국 인체조각이라는 형식 뒤에서 작가가 본질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고정된 관념과 특정한 규정으로부터 벗어나 실재를 직시하는 것이다따라서 작가는 이러한 유동적 상황을 만들어 내기 위해 조각이 가진 요소를 하나씩 제거해 나감으로써무엇인가를 재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태도와 방식만을 남긴다.그렇기에 이는 완성된 결과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하고불명확한 상황으로 우리를 이끈다그리고 그의 인체 작업은 아무것도 아님과 동시에 완전하게 어떤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장소로 변모 된다이렇게 그의 인체 조각은 오히려 그것으로써 우리가 바라보는 대로 새로운 의미들을 만들어내도록 유연하게 열려있으며,우리는 이를 구체적 의미를 생산하는 고정된 대상으로써의 인체가 아니라 유동적이며추상적인 대상으로 보아야 것이다.







Anthropometry

Anthropometry  88 x 144 x 38cm. polyurethane, wood, plaster. 2018

 
 

 

Anthropometry

Anthropometry  100 x 87 x 57cm. polyurethane, wood, plaster. 2018


 

STATUE X STATUE - Sangup Gallery






Statue X
 29 x 119 x 139cm
 polyurethane, wood, plaster
 2018




Statue X - Torso 106 x 56 x 70cm
 polyurethane, wood, plaster, epoxy
 2018







Anthropometry







STATUE X STATUE




STATUE X STATUE
 
고전주의적 인체조각의 과정 중 완성단계의 형태와 매스를 최초의 기본 단위로 설정하고 그것에서부터 확장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이것은 물성이 강한 조각적 표면으로 귀결되어, 유동할 수 없이 고착되는 단계. , 조각적 완결성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완결을 본 작업의 시작단계로 가져와 기본의 단일 형태와 매스를 미리 설정하고 그것의 윤곽을 해체하고 재조합 하는 방식으로 무한하게 변형, 확장 하고 있다.
완성에서 시작되는 본 작업방식은 완성이 결여된 채 진행 되는데 이 작업으로 인해 예측 불가능한 진행형의 조각과 그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Anthropometry-Walking woman




Anthropometry-Walking woman. 156x54x124cm. polyurethane, wood. 2017



Anthropometry



Anthropometry. 144x70x51cm. polyurethane, wood. 2017 
 

Anthropometry

Anthropometry. 164 x 57x 61cm.polyurethane ,wood,plaster. 2017
 

 

 


Bust

Bust. 37x18x49cm. polyurethane,plaster,epoxy. 2017


Anthropometry <전시서문>






보이지 않는 것의 재현  -   정현(미술비평, 인하대학교)
                                                                                                                                                                                              
양태란 발생하는 모든 것, 즉 파동과 진동, 이주, 문턱과 구배, 특정한 모태로부터 시작해 특정한 유형의 실체 아래에서 생산된 강렬함이다.” 1)
 
그림이 인간을 겉모습을 재현하려는 행위라면, 조각은 인간을 만드는 행위에 가깝다. 흙으로 빚은 인간의 형상, 무한한 염원을 담아 만든 투박한 민초의 불상은 인간이 조각을 대하는 태도가 단순히 정확한 재현이 아니란 걸 알려준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장소를 차지하고 우뚝 서 있는 조각상을 그저 바라보는 대상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조각상은 시대를 막론하고 숭배와 혐오, 서로 대립되는 두 감정을 산출한다. 수많은 기념동상은 이념과 체제의 변화에 따라 그 운명이 달라진다. 흥분한 군중은 실제 인물을 대신해 그/그녀를 닮은 조각상에 분풀이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르네상스 시대에도 조각이 우상이 되는 걸 염려했다는 사실은 인체 조각이란 실존과 재현이 서로 분리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떠올리게 한다.
 
조각이 인간의 형상을 다시 적극적으로 재현하기 시작한 건 20여 년 전부터였다. 그동안 구상 조각이 덜 보였던 이유는 모더니즘 미학 체제에 따라 물질 자체의 물성과 장소를 점유하는 다양한 방식 그리고 대지와 자연에 개입하여 생성과 소멸의 시간성을 강조하여 재현 조각의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모더니즘 정신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재등장한 인체 중심의 구상 조각은 인간 형상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다시 마주한다. 새로운 인체 조각은 신체와 장소의 관계를 실험하고, 상품자본주의를 극단으로 전유하고, 인체를 그대로 복제하여 재현이란 미학적 체제를 모호하게 만들고, 극사실적 재현을 통하여 포스트 휴먼의 불안을 야기하는 등, 인류가 겪고 있는 폭력, 혐오, 불안, 단절로 치닫는 동시대의 개인을 재현한다. 이 조각들은 우상과는 거리가 먼 불안정하고 괴기스럽게 변하는 불확실한 불-안한 신체(dis-easy body)이다.
 
이병호는 조각의 재현성자체를 문제적으로 본다. 그는 실제 공간을 점유하고 부피와 무게를 지닌 조각을 두고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어보길 원한다. 초기작부터 꾸준히 천착한 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작업 태도는 전에 비하여 훨씬 더 조각의 본질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전시 표제 앤트로포메트리(Anthropometry)”는 인체측정이란 의미를 가지며, 이브 클라인의 작업 제목이기도 하다. 이 작업은 여성 모델들이 직접 자신의 몸 위에 물감을 칠한 뒤 벽에 세워진 화면 위에 자기 신체의 얼룩을 남겨 재현의 방식, 그림의 규범에서 한순간에 다른 차원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재현을 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형상을 제시한 작업으로 유명하다. 이전 개인전 <() Le Vide>(2016)에서도 이브 클라인의 흔적은 쉽게 발견된다. 프랑스 현대미술관에서는 몇 해 전에 <Le Vide>라는 기획전을 연 적이 있었다. 미술관 내부에 작품을 하나도 놓치 않은 상태로 전시를 진행하여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관객들은 텅 빈 공간을 배회하다가 지쳐 미술관을 나오는 전시로도 악명도 높았다. 이병호는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존재를 조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도 인체 조각을 통해서 말이다. 초기에는 실리콘 조각 내부에 공기 주입장치를 사용해 공기흡입 시 얼굴이 수축되는 다소 극단적인 방식으로 인간, 존재, 생명이 무엇인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이후 박제의 원리를 차용한 대안적이고 가변적인 조각 방식을 통해 인간의 외형과 신체의 내부를 분리한다. 박제가 신체의 외부만을 남기고 내부는 제거한 뒤 형상을 재현하는 방식이라면, 이병호는 바로 그 내부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이지 않는 것을 재현할 수 있는가가 이 작업의 핵심이다.
 
몸의 재현이란 단순한 아름다움과 유사성에 관한 개념이 아니다. 몸의 재현이란 사회 체제가 만들어내는 가치의 재생산이다. 그런데 재현하되 닮음을 비교할 수 없으며, 하나의 원형에서 파생되었지만 서로 동일하지 않는 상태의 몸으로 계속 변태한다는 건 미학적 의미를 지닌 몸의 재현이란 개념과 배치된 이병호의 작업은 초기부터 지금까지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 위에서 펼쳐진다. 작가는 이 경계 위에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조각에 관한 낡았지만 여전히 강력한 관습에 대한 미시적인 저항으로, 조각이 신체를 재현한 인공적 가공물(artefact)을 넘어서 시간과 함께 변화하는 존재의 가능성을 시도한다. 조각의 경계에 관한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분석은 이병호가 추구하는 신체가 아닌 신체 너머의 존재성이란 물음에 어느 정도 유의미한 단서를 제공한다. “로댕의 조각에 있어서는, 우리가 내적이고 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외적이고 공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사이의 경계선인 신체의 표면이 바로 의미가 발생하는 장소이다.”2) 크라우스는 신체의 표면은 내부의 힘, 즉 인간의 근육의 움직임에 의하여 나타난다고 명시한다. 즉 조각의 겉과 속이 연결된 상태로 결국 여기서 말하는 표면(경계)이란 곧 세잔이 지각한 현상학적 세계관과 유사하다. “로댕은 계속적으로 관람자가 작품을 과정의 결과로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상을 이루는 행위의 결과로서 인식하게 만든다3)는 점을 주목한다. 로댕이 자신의 조각의 표면, 형상의 경계 위에 의식의 흐름을 기입했다면 이병호는 시간의 흐름을 분해하고 이를 재조합하여 시간의 질서를 혼합해버린다.
 
우선 전시 포스터부터 살펴보자. 포스터에는 모두 두 개의 형태가 혼합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측정도, 프란시스 베이컨의 육면체. 여기에 이브 클라인의 사상이 덧붙여진다. 다빈치의 인체가 완벽한 비례를 가진 이상적 인간상이라면, 베이컨의 신체는 이와 배치된다. 그것은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며 유동적이고 비이성적이다. 광기와 불안으로 이 신체는 인간의 몸에서 탈주하여 기관 없는 신체가 된다. 들뢰즈가 제시한 기관 없는 신체란 형상 없는 형상을 의미한다. 그가 말하는 노마디즘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장소로 이동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같은 곳에서 끊임없이 다른 것, 이질적인 것의 파편들과 재조합하여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자신의 형상을 해체하여 그 조각들을 반복적으로 재조합하는 것처럼 말이다. 베이컨의 육면체는 고립된 공간이 아닌 변형과 재조합이 일어나는 고원과 마찬가지다. 이병호는 실제 신체를 원형으로 한 주물을 뜬 후 이를 다수 복제한다. 복제물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형을 겪는다. 가슴 일부가 절개되고 엉덩이 부분이 일부 제거된다. 이 파편들은 다른 복제물의 신체 사이로 접합되고 이식된다. 일련의 과정은 움직임에 대한 반응이다. 미래주의 조각이 동세를 넘어 시간의 경과를 재현한 것과 비교해보면 그와는 반대의 방식으로 시간성이 기입된다. 이병호의 조각들이 앞으로 무엇으로 변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인체의 재현과 형상이 갖는 상징성으로부터의 탈주, 그리고 보이는 것이 아닌 존재하는 것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예술가가 예술가로 계속 살아가는 방식일 것이다.
 

1)들뢰즈 & 가타리,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3, 295

2)로잘린드 크라우스, 현대조각의 흐름예경, 1998, 42

3)같은 책, 44(굵은 체는 필자 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