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hropometry <전시서문>






보이지 않는 것의 재현  -   정현(미술비평, 인하대학교)
                                                                                                                                                                                              
양태란 발생하는 모든 것, 즉 파동과 진동, 이주, 문턱과 구배, 특정한 모태로부터 시작해 특정한 유형의 실체 아래에서 생산된 강렬함이다.” 1)
 
그림이 인간을 겉모습을 재현하려는 행위라면, 조각은 인간을 만드는 행위에 가깝다. 흙으로 빚은 인간의 형상, 무한한 염원을 담아 만든 투박한 민초의 불상은 인간이 조각을 대하는 태도가 단순히 정확한 재현이 아니란 걸 알려준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장소를 차지하고 우뚝 서 있는 조각상을 그저 바라보는 대상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조각상은 시대를 막론하고 숭배와 혐오, 서로 대립되는 두 감정을 산출한다. 수많은 기념동상은 이념과 체제의 변화에 따라 그 운명이 달라진다. 흥분한 군중은 실제 인물을 대신해 그/그녀를 닮은 조각상에 분풀이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르네상스 시대에도 조각이 우상이 되는 걸 염려했다는 사실은 인체 조각이란 실존과 재현이 서로 분리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떠올리게 한다.
 
조각이 인간의 형상을 다시 적극적으로 재현하기 시작한 건 20여 년 전부터였다. 그동안 구상 조각이 덜 보였던 이유는 모더니즘 미학 체제에 따라 물질 자체의 물성과 장소를 점유하는 다양한 방식 그리고 대지와 자연에 개입하여 생성과 소멸의 시간성을 강조하여 재현 조각의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모더니즘 정신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재등장한 인체 중심의 구상 조각은 인간 형상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다시 마주한다. 새로운 인체 조각은 신체와 장소의 관계를 실험하고, 상품자본주의를 극단으로 전유하고, 인체를 그대로 복제하여 재현이란 미학적 체제를 모호하게 만들고, 극사실적 재현을 통하여 포스트 휴먼의 불안을 야기하는 등, 인류가 겪고 있는 폭력, 혐오, 불안, 단절로 치닫는 동시대의 개인을 재현한다. 이 조각들은 우상과는 거리가 먼 불안정하고 괴기스럽게 변하는 불확실한 불-안한 신체(dis-easy body)이다.
 
이병호는 조각의 재현성자체를 문제적으로 본다. 그는 실제 공간을 점유하고 부피와 무게를 지닌 조각을 두고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어보길 원한다. 초기작부터 꾸준히 천착한 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작업 태도는 전에 비하여 훨씬 더 조각의 본질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전시 표제 앤트로포메트리(Anthropometry)”는 인체측정이란 의미를 가지며, 이브 클라인의 작업 제목이기도 하다. 이 작업은 여성 모델들이 직접 자신의 몸 위에 물감을 칠한 뒤 벽에 세워진 화면 위에 자기 신체의 얼룩을 남겨 재현의 방식, 그림의 규범에서 한순간에 다른 차원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재현을 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형상을 제시한 작업으로 유명하다. 이전 개인전 <() Le Vide>(2016)에서도 이브 클라인의 흔적은 쉽게 발견된다. 프랑스 현대미술관에서는 몇 해 전에 <Le Vide>라는 기획전을 연 적이 있었다. 미술관 내부에 작품을 하나도 놓치 않은 상태로 전시를 진행하여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관객들은 텅 빈 공간을 배회하다가 지쳐 미술관을 나오는 전시로도 악명도 높았다. 이병호는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존재를 조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도 인체 조각을 통해서 말이다. 초기에는 실리콘 조각 내부에 공기 주입장치를 사용해 공기흡입 시 얼굴이 수축되는 다소 극단적인 방식으로 인간, 존재, 생명이 무엇인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이후 박제의 원리를 차용한 대안적이고 가변적인 조각 방식을 통해 인간의 외형과 신체의 내부를 분리한다. 박제가 신체의 외부만을 남기고 내부는 제거한 뒤 형상을 재현하는 방식이라면, 이병호는 바로 그 내부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이지 않는 것을 재현할 수 있는가가 이 작업의 핵심이다.
 
몸의 재현이란 단순한 아름다움과 유사성에 관한 개념이 아니다. 몸의 재현이란 사회 체제가 만들어내는 가치의 재생산이다. 그런데 재현하되 닮음을 비교할 수 없으며, 하나의 원형에서 파생되었지만 서로 동일하지 않는 상태의 몸으로 계속 변태한다는 건 미학적 의미를 지닌 몸의 재현이란 개념과 배치된 이병호의 작업은 초기부터 지금까지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 위에서 펼쳐진다. 작가는 이 경계 위에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조각에 관한 낡았지만 여전히 강력한 관습에 대한 미시적인 저항으로, 조각이 신체를 재현한 인공적 가공물(artefact)을 넘어서 시간과 함께 변화하는 존재의 가능성을 시도한다. 조각의 경계에 관한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분석은 이병호가 추구하는 신체가 아닌 신체 너머의 존재성이란 물음에 어느 정도 유의미한 단서를 제공한다. “로댕의 조각에 있어서는, 우리가 내적이고 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외적이고 공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사이의 경계선인 신체의 표면이 바로 의미가 발생하는 장소이다.”2) 크라우스는 신체의 표면은 내부의 힘, 즉 인간의 근육의 움직임에 의하여 나타난다고 명시한다. 즉 조각의 겉과 속이 연결된 상태로 결국 여기서 말하는 표면(경계)이란 곧 세잔이 지각한 현상학적 세계관과 유사하다. “로댕은 계속적으로 관람자가 작품을 과정의 결과로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상을 이루는 행위의 결과로서 인식하게 만든다3)는 점을 주목한다. 로댕이 자신의 조각의 표면, 형상의 경계 위에 의식의 흐름을 기입했다면 이병호는 시간의 흐름을 분해하고 이를 재조합하여 시간의 질서를 혼합해버린다.
 
우선 전시 포스터부터 살펴보자. 포스터에는 모두 두 개의 형태가 혼합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측정도, 프란시스 베이컨의 육면체. 여기에 이브 클라인의 사상이 덧붙여진다. 다빈치의 인체가 완벽한 비례를 가진 이상적 인간상이라면, 베이컨의 신체는 이와 배치된다. 그것은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며 유동적이고 비이성적이다. 광기와 불안으로 이 신체는 인간의 몸에서 탈주하여 기관 없는 신체가 된다. 들뢰즈가 제시한 기관 없는 신체란 형상 없는 형상을 의미한다. 그가 말하는 노마디즘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장소로 이동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같은 곳에서 끊임없이 다른 것, 이질적인 것의 파편들과 재조합하여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자신의 형상을 해체하여 그 조각들을 반복적으로 재조합하는 것처럼 말이다. 베이컨의 육면체는 고립된 공간이 아닌 변형과 재조합이 일어나는 고원과 마찬가지다. 이병호는 실제 신체를 원형으로 한 주물을 뜬 후 이를 다수 복제한다. 복제물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형을 겪는다. 가슴 일부가 절개되고 엉덩이 부분이 일부 제거된다. 이 파편들은 다른 복제물의 신체 사이로 접합되고 이식된다. 일련의 과정은 움직임에 대한 반응이다. 미래주의 조각이 동세를 넘어 시간의 경과를 재현한 것과 비교해보면 그와는 반대의 방식으로 시간성이 기입된다. 이병호의 조각들이 앞으로 무엇으로 변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인체의 재현과 형상이 갖는 상징성으로부터의 탈주, 그리고 보이는 것이 아닌 존재하는 것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예술가가 예술가로 계속 살아가는 방식일 것이다.
 

1)들뢰즈 & 가타리,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3, 295

2)로잘린드 크라우스, 현대조각의 흐름예경, 1998, 42

3)같은 책, 44(굵은 체는 필자 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