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것들, 부재하는 것들에 바치는 오마주
고충환 (미술비평, 미학)
세계와 세계 자체는 다르다. 이런저런 지식의 패치들의 무분별한 집합으로 구조화된 세계는 어쩌면 세계 자체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이런 지식으로 구조화된 세계에 붙잡혀있는 한, 세계 자체는 끝내 붙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이처럼 세계 자체가 아닌, 누군가의 지식으로 이미 구조화된 세계 속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그 지식이 나의 세계를 형성시켜주고, 나를 형성시켜준다. 그러므로 나의 지식은 나의 지식이 아니며, 나의 세계는 나의 세계가 아니며, 나는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의 실체, 나의 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 세계 자체는 요원한 일인가. 어떻게 세계 자체와 대면할 수 있고, 그 원초적이고 원형적인 사건으로부터 나의 실체를 오롯하게 거머쥘 수가 있을 것인가.
이병호의 작업은 바로 이 의문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인간을 진공 포장시켰다(Vacuum Packed Boy). 진공이 너의 지식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이미 구조화된 지식의 영향관계로부터 나의 실체를 오롯하게 간직할 수 있는 방책이라고 여겼다. 마치 현상학적 에포케로 부를 만한, 의식의 영도지점으로 명명할 만한 상황을 가정해본 것이며, 일종의 의식의 진공상태를 가정해본 것이다. 그러나 이미 너의 지식으로 충분히 구조화되고 내재화되고 오염된 나를 그 원초적이고 원형적인 사건으로 되돌려놓을 수는 없는 일이며, 그런 만큼 현상학의 상황도 기획도 임시방편의 상황이며 기획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작업은 외부로부터의 영향관계로부터 자기의 진정한 실체를 보존하려는 작가의 그리고 인간 일반의 영웅적인 기획과 그 기획의 불가능성에 대한 알레고리 같다.
이병호가 제안한 신체는 실리콘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신체라기보다는 신체의 껍질들이며 허물들이다. 신체의 껍질들에 바람(공기)을 주입시켜 형태를 변형시키는 것인데, 여기서 신체의 껍질들은 저마다의 나를 의미하며, 바람은 외부로부터의 영향관계를 상징한다. 바람이 신체를 변형시키듯 외부로부터의 영향관계가 나를 형성시키고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고정된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영향관계에 의해 변형된다. 나는 말하자면 그렇게 변형될 수 있는 비결정적인 껍질이며 허물이며 막이며 피부다. 그 바람, 그 영향관계로 치자면 욕망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작가는 각각 부풀어 오른 꼬마의 성기(SANAI)로, 여자의 가슴(Volume up Venus)으로, 남자의 근육(Torso)으로 이 욕망을 형상화하고 변주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욕망의 동물이라고 했다. 인간을 인간이게 해주는 인간만의 정의가 여럿 있지만, 그 정의들보다 우선인 정의가 욕망인 것으로 보았으며, 특히 모든 욕망은 사실상 성적 욕망이 전이되고 변형된 경우라고 본다. 이렇게 사춘기 소년의 성기는 세상을 향해 발기되고, 여자는 가슴을, 남자는 근육을 부풀린다. 그러나 그렇게 발기된 성기도, 부풀어 오른 가슴이나 근육도 사실은 조형물에 주입된 공기에 의한 것으로서, 그 공기가 빠지면서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진다. 이처럼 한껏 부풀어 올랐다가 재차 원래 상태 그대로 되돌려진 조형물이, 공기가 빠지고 김이 빠진 조형물이 욕망의 실체를 알게 한다.
욕망은 인간의 조건이다. 욕망은 인간을 생기에 넘치게 한다. 욕망이 빠지면 생기도 빠지고 김도 빠진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기를 유지하기 위해선 한순간도 욕망의 드라이브를 멈출 수가 없다. 욕망이 멈춘 순간, 김이 빠진 순간은 곧 죽음이다. 욕망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피하기 위한 것이며, 죽음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것이다. 이렇듯 죽음을 터부시하는 것에 가부장적 유산과 자본주의의 결탁이 있고 공모가 있다. 세상을 향해 발기된 남근은 아버지의 정언명법으로 대리되는 제도의 기획을 상징하며, 신체를 성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욕망이 그 기획에 복무한다. 즉 첨예한 경쟁사회(고도로 제도화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건강한 육체를, 매력적인 육체를, 남들보다 우월한 육체를 유지해야 한다. 경쟁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의 가치를 상실한 육체, 젊음을 상실한 육체, 매력을 잃은 육체를 위한 자리는 없다. 욕망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 사람들이 기어오르고 추락하는 <Rising or Falling>, 추락해서 밟혀 죽은 <Stand up>, 권력을 상징하는 의자에 짓눌려 두상이 뭉개진 <Position> 에서 보듯 어디에도 더 이상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렇듯 마치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 양 죽음을 몰아내는 사회에서 작가는 오히려 죽음을 거머쥔다. 욕망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욕망의 이면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꼬마를 소재로 한 <Childhood>, 각각 소녀와 작가 자신의 자소상을 소재로 한 <Vanitas Bust>, 그리고 웅크린 자세로 모로 누워있는 여인을 소재로 한 <Deep Breathing> 같은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삶의 이면에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를 불러들인다. 온전한 형상 그대로 떠낸 실리콘과 단단한 재질로 만든 왜곡된 형상(앙상한 뼈가 드러난 해골 형상)을 각각 만든 연후에, 단단한 형상 위에 실리콘을 덮씌운다. 그리고 그 한 벌의 형상에 장치를 이용해 공기를 압착시키면 실리콘 내부에 숨어있던 단단한 재질의 해골 형상이 드러나게 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순진해서 행복했던 유년시절이 있었고, 영원할 것만 같은 청춘이 있었고, 변하지 않을 아름다움으로 가슴 떨리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외관상 이런 시절의 정점을 형상화한 작가의 실리콘 조각은 그 실체가 손에 잡힐 것 같은 섬세함이나, 부드럽고 우호적이고 은근한 색감과 질감으로 보는 이를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보면서 만져지는 경지, 말하자면 일종의 촉각지 내지는 촉각시라고 부를 만한 매력이 있다. 그러나 그 매력에 너무 빠져 있어서도 방심해서도 안 된다. 바람이 빠지면서 꼬마는 해골로 변하고, 청춘은 노인으로 변하고, 여인의 아름다운 몸매는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다. 삶의 그림자인 죽음을, 에로스의 그림자인 타나토스를, 영원의 그림자인 덧없음(바니타스)의 비의를 폭로한다. 시절도, 청춘도, 아름다움도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더 간직하고 싶고, 더 머물고 싶고, 더 같이하고 싶은 것일수록 그만큼 더 빨리 사라져버려 빠르게 그리움 쪽으로 편입되고 변질되고 만다. 작가의 매력적인 조각은 그 덧없는 그리움 앞에 서게 만든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Home_Shade Tree>를 주제로 한 일련의 작업을 선보인다. 특히 나무 그림자 혹은 나무 그늘 혹은 그림자 나무 정도를 의미할 부제에서 나무보다는 그림자에 그 의미비중이 실린다. 전시장 전체를 일종의 집처럼 꾸민 것인데, 아마도 큰 그늘을 만들어주던 나무가 있던 옛 집을 회상하기 위한 것이며, 혹은 나무 그늘로 상징되는 회상 자체, 기억 자체의 속성을 떠올리기 위한 것일 터이다. 집 여기저기에 작가가 만든 실리콘 조각들을 배치해 놓았는데, 주지하다시피 그 조각들은 하나같이 청춘에서 노년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유년과 청춘의 아름다움으로 가슴 떨리던 시절이 과연 실재했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의 개인사에서 발췌한 색 바랜 흑백사진들이 부가되면서 그 의문은 증폭된다. 그런가하면 반투명 유리 케이스 안에 담겨진 조상이 반투명한 유리에 가려 그 실체가 선뜻 손에 잡히지가 않는데, 그 조상 역시 비실제와 비현실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일련의 조각들이나 흑백 사진들 자체는 비록 현재에 현존하는 것들이지만, 사실은 과거로부터 호출된 부재하는 시절에 바치는 오마주일지도 모르고, 아득하고 아련한 만큼이나 멀고 큰 강도로서 다가오는 그리움을 형상화한 것일지도 모른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공기를 매개로 죽음의 표상 앞에 서게 했듯, 행태도 색깔도 소리도 없는 그리움이란 순전한 심리적 사실 혹은 경험을 감각의 표면 위로 불러내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재하는 것들(존재의 흔적들)로 하여금 존재의 표상이 되게끔 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무 그림자보다는 그림자 나무라는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그 제목이 더 비실제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부재를 더 잘 환기시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