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w-Up < 리뷰 - 이선영 >

  
 
 
 
 

 

삶과 죽음의 역동적인 호환성
 
이선영 / 미술평론가
 
차가운 석고 조상처럼 굳어있는 소년의 흉상이 숨 쉬듯 움직일 때,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그것이 해골 형상으로 변화할 때, 삶과 죽음은 하나의 원환 속에서 꼬리를 문다. 이병호의 조각은 삶에 죽음이, 죽음에 삶이 내재해 있다는 진실을 일깨운다. 그의 작품에 어른거리는 죽음의 심연은 삶의 얄팍한 책략을 극복하는 긍정적인 힘으로 역전되곤 한다. 검고 긴 복도 끝에 놓인 정면의 조상과 달리, 뒤통수가 해골로 변하는 작품은 예기치 않은 죽음의 그림자에 더욱 섬뜩해 진다. 석고조상처럼 보이면서 피부 같은 부피의 가변성을 부여하는 재료는 실리콘이다. 실리콘은 유기체를 이루는 단백질 대신에 피부를 이루면서, 살의 조각적 재현이라 할 수 있는 석고도 대신한다. 그것은 살이나 광물질 같은 덩어리가 아니라, 피막을 통해 몸을 표현한다. 육체의 껍질처럼 벗겨진 실리콘 막을 널어놓은 작품은 몸의 표면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피막이 다시 3차원의 형상을 갖출 때 조직적인 힘이 개입되는데, 피막을 감는 실은 제멋대로 퍼져 나가려는 리비도적 표면에 일련의 관계망을 부여한다. <blow up>에서 두 여체 상의 부풀어 오르는 팔 근육을 만드는 것은 실이다. 그러나 괴물 같을 정도의 멋진 몸을 만들기 위해 엄격한 규율이 관철되듯, 몸의 형태를 구조화하는 힘은 가혹한 고문의 양상을 띤다.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같은 제목의 여체는 공중에 매달린 채 삶과 죽음의 선을 넘나든다. 이병호의 작품에서 육체의 형태를 규정짓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공적인 힘이다.
죽음에 이르는 폭력을 야기하는 이 힘의 실체는 계층적인 질서를 상징하는 나무 의자가 두상을 깔아뭉개는 <position>에서 구체적으로 예시된다. 또 다른 희생자의 머리는 일정한 형태로 구획되어 있다. 몸뿐 아니라 영혼조차도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구조화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끈이 없다면 인간은 자유로울까. <rising or falling>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듯하다. 작은 풍선 인간들은 어떠한 제어 장치도 없이 자신의 욕망만큼 부풀어 올라 있다. 군상들은 한 틀에서 찍어낸 듯 모두 똑같은데, 그들은 출구가 없는 꼭대기로 앞 다투어 올라가거나 추락한다. <stand up>에서 낙오된 이들은 밟혀 죽는 것으로 나온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허무주의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질없는 욕망으로 한껏 부풀어 오를 때조차도 죽음이 서려 있는 이병호의 작품들은 죽음까지를 포함한 인생의 전면적 긍정’ (바타이유)을 향한다. 그의 모든 작품에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는 촘촘하게 심신을 규정짓는 사회 언어적 구성물(linguistic construct)로부터 몸을 비켜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 몸은 각인과 약호화로 특징지어지는 권력의 미시기술에 의해 제어된다. 그렇지만 피터 부룩스가 육체와 예술에서 지적하듯, 다른 한편으로 육체는 전()문화적이며 전()언어적이기도 하다. 쾌락의 감각 특히 고통의 감각은 언어 외적인 경험이다. 육체의 종말인 죽음 또한 단순한 담론적 구성물이 아니다. 미술을 포함한 모든 언어적 담론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저항, 혹은 죽음에 대항하여 인간 정신을 회복하고 보존하기 위해 인간이 경주하는 노력인 것이다.